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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뜨는 교회가 있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개칭되어 불리워지는 이때에 참신한 교회로 부각되어 뜨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위하여 몸집을 불리고 자신들의 집단만을 위하여 몰입하던 이기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행위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 교회는 네 개의 교회로 분립되면서 성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인되는 교회'를 실현한다는 높은뜻을 목회철학으로 하고 있으며 높은뜻 사역을 실천하는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기존 기독교의 낡은 목회 철학을 대신하면서 부각되는 것은 이 시대에 너무도 당연할 것일까?

주일이면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토해내는 높은뜻 가치들은 많은 성도들에게 감동을 준다.
성전없는 교회(보이지 않는 성전)를 추구하면서 탈북자를  위한 열매나눔재단을 세웠고, 차세대교육을 위한 여명학교를 세웠다.

평양에 세우는 수백억원이 드는 대학교에도 수십억원이 투입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높은뜻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기에
한 치의 거부감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높은뜻 교회가 하는 모든 행위는 높은뜻으로 간주되고 치부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높은뜻을 추구하는 높은뜻의 마인드인 headquarters에 올바른 지성과 균형을 갖춘 이성의 검증이 요구되는 것은 왜일까?

어제는 일요일이었다.

국가 지도자를 잃은 슬픔으로 국상을 치루는 전국은 슬픔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국민 모두가 그 분의 생애를 이야기하며 저마다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명복을 빌었고 영면하시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설교가 끝나는 시간까지 국상에 대한 한마디 언급을 하지 않은 목사의 설교는 어딘지 허전하고 아쉬웠다.
그리고 그 '높은뜻'이란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주일(하루)였다.

이렇듯 현실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면서 어떤 높은뜻을 세운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높은뜻 그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