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정신이 간혹 겨울 밤하늘처럼 맑았다가도
당신이 내뱉는 말의 두서없음이 여름 장마철처럼 그 가늠이 쉽지 않아
절로 제 짜증이 배가 될 때가 간혹 있는데,
다행히 그 짜증을 쉬 잊어버릴 수 있는 제 기억력의 한계와
제 어머니 방에 걸린 아버님 영정의 신묘한 지켜봄의 위력도 있었겠지만
제 누이들과 제게는 지난 1년의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1년 전 오늘,
어머니는 구리 한양대 병원에서 8개월여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수동 비금리 집으로 오셨는데,
오늘 새벽녘,
어젯밤 꿈 속에서 몇 년 전 죽은 남동생을 보았다고 제게 얘기를 하셨습니다.

"대섭이 삼촌 죽었지?"
"엄마, 그 일이 기억나?"

어머니에게 갑자기 떠오른 그 기억이 새로이 아프지 않았으면 싶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그 기억까지 그리 어렵사리 온 것이
저로써는 당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예상치 못한 닥침이었지만,
그로 인해 줄줄이 사탕처럼 건져낸 추억 하나도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이북분들이신데
아버지는 함경도 성진,
어머니는 황해도 해주 부근의 신막이 고향이십니다.

지금은 제 아버님 생전의 그 깊은 외로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데,
6.25 동란(動亂)이 터지면서 이북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아버님은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제 어머니와 그 윗대의 분들은 다행히 운수업을 하셨던 이모부님 덕에  
부산까지 피난을 오셨던 것 같은데
그때 부산 송도에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이 맞았던 모양입니다.
두 분께 그 추억 얘기를 듣고는 저도 부러 제 직장의 부산지부를 선택해
제 부모님이 연애의 근거지로 삼던 송도에서 자취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이 영도가 바로 보이는 송도 제 자취방에 찾아와
자신들의 어렴풋한 옛 추억에 빠져들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제 어머니의 언니였던 제 이모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절로 떠오르는 사람인데
그 이름은 '한수복'입니다.

자기 밑의 동생들 셋을 공부시키느라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고 바보처럼 살다 간 여자였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그분께 많이 혼나기도 했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그 분이 조카들에게 사다주던, 어느 호텔에서 만든 쵸코로 코팅된 후르츠 케이크가 많이 생각납니다.

오늘 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제 누이들에게 추억의 후르츠 케이크를 선물할만한 돈이 보입니다.
희주는 어제 기말시험을 마지막으로 2년간의 짧은 대학생활을 마감했는데
희주도 기억하는, 그래서 올해라고 지나칠 수는 없는 그 추억의 맛이 너무 강렬합니다.
추억과 추모의 념이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올해이니까......

아버지, 엄마 정말 많이 좋아졌지요?
호랑이 아줌마(이모)!, 그 케이크가 그리워요,
대섭이 삼촌!, 엄마에게 꿈 속에 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제가 처음 수동 비금리로 이사올 때는 길가의 가로등 불빛이 열 개 였었는데
이 밤, 데크에 나가 세어보니 열네 개로 늘었습니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었습니다.^^*